글쓰기 - 쓸거리

러브레터, 작별의 인사

CreamPPang 2021. 10. 2. 07:30

영화 속 배경인 오타루일까?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겡끼데스!”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흥행한 일본영화 러브레터 속 여주인공의 유명한 대사이다. 중학교 2~3학년때쯤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다 본 영화인데 내 인생영화가 되어버렸다. 재밌다는 사람들 입소문 때문에 본 영화는 아니었고 OST가 좋아서였다.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영화음악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는데, 유키구라모토가 OST에 작업했고 피아노와 현악기의 조화와 선율이 아름답다고 하길래 왠지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유키쿠라모토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영화에 크게 관심도 없었는데 말이다. 우선 엄마에게 받은 용돈을 들고 음반가게로 가 러브레터 OST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커다란 전축에 테이프를 넣고 한 곡 한 곡 감상을 시작했다. ‘음~평온하고 잔잔하다.’ 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아, 나는 음악을 감상할 줄 모르나.’ 자신에게 조금 실망을 하며, 빌려놓은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있는 언덕에 여주인공이 누워 숨을 한참 참다가 결국 터트린다. 약혼자가 등산하다 조난당하여 그녀의 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고 그날은 그의 추모식 날이다.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우연히 그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다 그가 옛날 살았던 집 주소를 발견하고 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편지를 보낸다. 얼마 후, “당신은 누구세요?”라는 짧은 문장의 답신을 받게 되고, 주인공은 직접 그 곳을 찾아간다. 편지를 보낸 여주인공 A와 거기에 답을 한 또 한명의 여주인공 B는 결국 대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A는 먼발치에서 자신과 생김새가 많이 닮은 B를 확인한다. 그리고 서로가 죽은 “그”와 추억을 가진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중학교 시절 그와 B는 같은 반이었고, 이름이 똑같아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당했었다. B는 어릴 적 그와 있었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편지와 폴라로이드 사진을 통해 A와 공유하게 된다. B는 살면서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되짚어 보다 실은 그가 자신을 좋아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B는 차마 그 사실을 A에게 전하지는 못했지만, A는 자신에게서 어릴 적 짝사랑한 B를 찾으려하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짐작하며 영화는 마무리 된다.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여러 컷 있지만 그 중에 최고는 여주인공 A가 설원에서 죽은 남자주인공에게 안부를 묻는 장면일 것이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중학생의 감성으로 왜 추운데 외투도 안 입고 눈밭에 서서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나 생각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눈가가 촉촉히 젖는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연인을 떠나보낸 적은 없지만 30대 후반이라는 나이를 먹으며 학습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랄까 이별과 상실감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안다. 몇 해전 할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낸 것이 여태껏 내 마음에 가장 커다란 구멍을 낸 사건이었다.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옆을 지켜주셨던 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실감에 비례하는 만큼의 눈물과 한숨을 쏟아내야 했다. 여주인공A도 결혼까지 약속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계절이 몇 번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그리워하는 걸 보면 그 상실의 깊이가 얼마나 컸을지 조금 짐작은 간다.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랑했던 사람을 마음에서 놓아주며 '잘 지내나요? 라고 안부를 묻지만 실은 잘 지내요! 잘 지내야해요! 나는 잘 지낼 거에요!' 하는 작별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동안 절대 풀지 않으려 했던 응어리를 한 번에 터뜨려 내는 듯,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 텅텅 비어버리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 허전함은 앞으로 누군가와 채워나갈 수 있기를...

요즘 같이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는 계절이 되면 러브레터 속 흩날리던 눈꽃을 떠올리며 메인 테마송 “Love Letter"를 듣는다. 20여년전 중학생을 잠들게 했던 음악은 이제 중년을 향해 가는 내게 지난 시간들을 회상케 하고 일상의 소란함에 평온을 가져다준다. 지루하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하다. 마치 영화 속 나왔던 작은 언덕, 눈부시게 하얀 설원 위에 누워있는 것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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