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 쓸거리

말을 위한 기도 / 이해인 수녀 시(詩)

CreamPPang 2023. 7. 8. 07:24

 

 평소 주위로부터 과묵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입니다. 여럿이 있을 때 특히 그렇습니다. 제게 시선이 집중되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심해서 피하고 싶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조리 있게 표현하는 말솜씨가 부족해서입니다. 삼사일언 (三思一言)이라고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한다" 신중히 생각하고 말하라는 의미인데 과묵한 저한테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내재된 듯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차 침묵할 때가 있어 이 부분은 좀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나머지 타이밍을 놓치기도 하고요. 단점이기도 장점이기도 합니다. 말이 많으면 주위에 사람이 모이지만 그 속에 적이 있을 수도 있고 근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말이 적으면 그만큼 근심이 적다는 게 장점이 될 수 있어요. 

 내 안에서 밖으로 나온 말이, 앞으로 나올 수많은 말들이 좋은 씨앗이 되어 뿌리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읽은 소설에 나왔던 이해인 수녀님의 시 한 편 소개합니다.

 

말을 위한 기도 (이해인)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닦게 하소서.

제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내뱉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롭고
좀 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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