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자주 듣던 말이 생각난다.
직장인은 3, 6, 9 단위로
위기가 온다.
3일에 한번 퇴사생각을 하긴 하지.
6개월에 한번 사람인, 잡코리아를 뒤적거려보지. 9개월에 한번은 아니지만 직장을 뛰쳐나가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지. 하루에도 몇 번씩 퇴사를 떠올리게 하는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일터에서 근무한지 만3년, 험준한 산을 힘겹게 넘고 있다. 불미스런 사건으로 믿고 따르던 팀장님은 좌천되었고 한 동료는 이곳을 떠났다. 두 사람의 일감은 고스란히 내게 왔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제한적이라 혼자 꾸역꾸역 소화하고 있다. 처음엔 즐기지도 않는 술까지 찾으며 심란해 했었다(딱 한번). 그래도 막상 해보니 또 할만하다 느끼기도 한다. 물론 한숨 푹푹 쉬며 버거움을 표현할 때가 많지만… 칼퇴를 한 기억이 까마득하다. 사무실 전등을 다 끄고 귀갓길의 가볍지 않은 몸과 마음을 다잡아 줄 기억들이 떠오른다.
엄마는 20-30대 때 여러 직업을 경험한 걸로 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간호조무사, 공장생산직, 보험설계사, 신발가게운영 등등 24살에 나를 낳으시고 내가 11살 때까지 이것저것 많이 해보신 듯 하다. 그러다가 아버지 직장발령으로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 이사 오면서 또 한번 직업을 바꾸셨다. 아버지가 관리직으로 계신 나름 이름 있는 업체의 생산직으로 입사하시게 된다. 그 후로 26년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장기근속자로 포상을 받으셨고, 정년퇴직도 하셨지만 계약직으로 전환하여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참으로 대단하다. 직장생활 고작 10년 한 나 따위가 넘 볼 수도 없는 경지임에 틀림없다. 단순히 26년이란 시간만을 비교한 게 아니라 그 넘실대는 바다 위의 시간을 악착 같이 버텨낸 엄마의 의지가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엄마는 입사 후 얼마 안되어 공장 노조 가입 권유가 계속 되었지만, 회사측 관리자로 있는 아빠의 입장 때문에 계속 거절을 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노조위원장이라는 작자가 찾아와 책상을 발로 차며 협박까지 했단다. 어떻게 그 상황을 참아 내셨는지, 아들로서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그 때의 엄마는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셨다 했다. 지나간 과거라고 덤덤하고도 가볍게 말씀하셨지만 왠지 내게는 가슴을 누르는 듯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중3때인지 고1때 엄마가 일하시는 공장 생산 물량이 많아 꽤 오랫동안 자정이 될 때까지 초과근무를 하신 적이 있다. 매일 자정이 돼서야 집에 오시는 엄마를 배웅하러 나갔다. 통근버스에서 내려 언덕진 길을 걸어 올라오는 그 피로한 발걸음을 그땐 정말 알지 못 했던 것 같다. 그저 어두운 밤길에 행여 위험할까 무서울까 늦은 귀가를 하는 엄마를 맞으러 간 순수한 10대 소년일 뿐이었다. 배웅 나온 아들을 보며 밝은 미소로 받아주신 엄마, 그 미소 뒤에 가려 놓은 직장 생활의 고단함, 삶의 고민거리, 무거운 책임감을 전혀 알지 못했다.
20여년이 지나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일 때문에 자주 늦은 귀가를 하셨던 그 때의 엄마 나이가 되고서야 조금 알 것 같다. 흔들리는 바다 위 엄마와 가족들이 탄 작은 돛단배 하나 지키려 얼마나 부단히 애쓰셨는지를.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를 본받아 나도 내 아내, 내 아이가 타고 있는 돛단배를 잘 지켜나갈 것이다. 직장이든 어디서든 백날 파도만 치는 궂은 날만 있는 건 분명 아닐테고 잔잔한 날도 온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오늘도 내일도 2미터짜리 사무실 책상 앞 전쟁터에서 당당히 살아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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